흔적 밟기.
요 며칠간의 나의 발길은 마음이 이끄는 대로 향했는데, 나는 이러한 현상을 '흔적 밟기'라 이야기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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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새하얀 눈 밭을 성큼성큼 걸어 나갔었다면, 이제는 그 발자국을 따라 조심스레 나의 발을 겹쳐 본다.
너무도 오랜만에 내리는 눈이 반가워 무턱대고 앞으로 뛰어 나갔었던 기억. 아무도 발 들이지 않았던, 끝이 없이 하얗게 펼쳐진 세상을 보며 마치 어린아이처럼 즐거워 했던 순간이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후 나는 다시금 그 장소를 찾게 되었는데, 앞으로 나아갔던 발자국도 당시의 풍경들도 그대로인 것이 아닌가. 허나 당시에 꽃송이 처럼 날렸던 눈발들은 모두 그치고 그 곳은 완벽한 침묵과 고요함으로 나를 맞이했다.
눈길 위의 푹 파인 발자국들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생각했다.
제대로 보지 못했던 주변의 풍경들은 여전히 그대로의, 그러나 새로운 모습으로 나를 반겨주었다.
당시에 나를 덮쳐왔던, 눈 앞을 아리게 했던 순백의 결정들이 가라앉은 뒤라 그런지 그곳은 더욱 더 넓고 깊은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이토록 아름다웠던 곳을 왜 그 순간에는 모두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나는 감정의 홍수들을 마음껏 만끽했다. 그리고는 다시, 평온함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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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밟기를 하며 휴일 오전, 나는 아무런 계획없이 교보문고에 들렀다. 평소라면 관심 가지지도 않았을 한 귀퉁이에 지나가던 나의 발길을 붙잡던 사진집이 있었는데, 정말로 언젠가 본 적이 있었던 느낌이 드는거다. 그리고는 마치 파리의 서점에서 바스키아의 책을 봤을때와 비슷한 기분이 들면서 분명히 당신이라면 그냥 지나치지 않았겠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그에게 바람 속의 남녀가 코트 깃을 부여잡고 키스를 나누는 사진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마치 다른 듯도 같은 듯도 하여 한참을 사진 앞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서 있었다. 그리고 결국 나는 그 사진들을 품에 안고 돌아왔다.
책의 비닐을 벗기며 내가 왜 이 사진들에 끌렸을까. 문득 떠오른 호기심에 작가의 작품들을 검색해보며 피식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파리 출신의 로베르 두아노. 나는 그의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 말로서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이제 나는 당신의 눈을 가진 듯, 네가 무엇을 시야와 마음에 담는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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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고 싶은 순간들을 글 또는 사진으로서 간직해 두는 버릇이 있었기에 다행이라 생각했다.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구름위에 떠 있는 기분이라 했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 한 밤중 꾹꾹 눌러썼던 이야기들.
가슴이 뛰었던 순간을 짧은 글귀로나마 표현하여 전할 수 있었음이 다행이라 생각했다.
나의 사랑에 빠진 순간을 다시금 돌이켜 볼 수 있음에.
아직도 그때의 시간과 공기. 나누었던 눈빛들을 생각하면 마치 심장이 부풀어 오르는 느낌마저 든다.
가슴이 미어질 듯한 아픔이 아니다. 왜일까, 너는 나에게 지금까지도 봄이다. 그 순간은 단 한번도 차가운 바람이 분 적이 없었다.